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물포 조약 (문단 편집) == 결과 == * 이때를 시작점으로 한반도에 주둔하기 시작한 일본군은 점점 더 규모가 커지고 커져서, 을사 조약 이후로는 2개 [[사단(군사)|사단]]에 이르게 된다. * 6항에 의거해 일본으로 특파된 [[박영효]], [[홍영식]], [[김옥균]] 등의 젊은 개화파는 파견 이후 친일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.[* 기본적으로 임오군란 이후로 청이 보여준 내정 간섭에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데다가, 일본 측이 이들을 워낙 융숭하게 대접했고, 체류 기간 동안 만난 [[후쿠자와 유키치]]에게 젊은 개혁파가 푹 빠졌던 탓도 컸다.] 그리고 이들이 다음해 행한 정치적 대모험수가 바로 [[갑신정변]]. 그 결과 조선은 한층 더 청나라에게 예속되고 만다. * 일본은 [[동학농민운동]]이 발발하고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 이 조약과 톈진조약에 기인하여 군대를 파견했다. 자국 공사관 보호를 위해 일정 정도의 군사를 주둔시킬 수 있다는 제물포 조약의 조항에 좀 더 중점을 두어 일본의 파병을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.[* 출처: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] [[분류:조선(19세기)]][[분류:1882년 협정]][[분류:메이지 시대]][[분류:조일관계]][[분류:한일관계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